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오로 3세 (문단 편집) == 재임 전 == [[이탈리아]] 카니노 지역의 명문 가문인 파르네제 가문 출신이다. [[고대 로마]] 시대 귀족 후예로 명문가인 오르시니 가문이나, 콜론나 가문만은 못하지만 그럭저걸 뼈대는 있는집안인데 파르네제 가문은 원래 용병대장 출신이었다. 그는 [[로마]]와 [[피렌체]]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으며,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하였고 훗날 교황 [[레오 10세]]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. 늙어서 교황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소싯적에는 날마다 사교 클럽에 참가하여 수많은 여성들과 교제하는 [[호색한]](!)이었고, 그의 누이 줄리아는 교황 [[알렉산데르 6세]]의 정부(情婦)로 '그리스도의 신부'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. 교황의 애첩인 누이 줄리아 파르네제의 덕으로 25세에 [[추기경]]이 되었지만, 이전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. 특히 한 정부와의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를 보았을 정도였다. 성직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는 쉴드가 있지만 사실무근인 게,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Pier_Luigi_Farnese,_Duke_of_Parma|장남 피에로 루이지가 1503년생이다.]]-- 뱃속에서 20년은 있어야 가능-- 그나마 위안거리라면, [[사제(성직자)|사제]]독신 규정이 느슨한 시기에 한 여인에게서만 낳았다는 점이다. 이 중 장남이자 파르마 공작인 피에로 루이지의 차남 오타비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파르마 공작이 되었고, 훗날 [[교황]]의 파트너인 [[카를 5세]]의 서녀와 혼인하게 되며[* 그 아들이 스페인 제국군의 명장 파르마 공작 [[알레산드로 파르네제]]], 장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제는 추기경 자리에 오른다. [[교황]] [[알렉산데르 6세]]에게 [[성품성사|서품]]을 받아 독실한 [[가톨릭]] 신자로 마음을 다잡은 후,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[[추기경]]으로 임명됐다. 그런데 이런 벼락 출세 뒤에는 그의 누이 줄리아가 [[알렉산데르 6세]]가 가장 아끼는 첩실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흑역사가 있다. 하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1509년 [[알렉산데르 6세]]와는 원수지간이던 교황 [[율리오 2세]]로부터도 파르마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. [[알렉산데르 6세]], [[비오 3세]], [[율리오 2세]], [[레오 10세]], [[하드리아노 6세]], [[클레멘스 7세]] 등 도합 6명의 교황을 모시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